알람 소리에 눈을 간신히 뜨고 번호표를 옷에 달면서, ‘내가 왜 이걸 다시 하겠다고 한 거지?’ 하는 후회가 살짝 고개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10년 만의 5K 재도전, 이미 남편과 러닝크루에 떠벌린 이상 물러설 곳은 없었습니다. 게다가 5K완주시- 남편의 300불 상금도 걸려있는 참입니다. 5시 반에 트로피칼 팍에 도착하니 이미 많은 사람들로 주차장은 꽉 막혀 있었습니다. 마이애미 사람들, 파티 아니고는 새벽에 안 일어나는 줄 알았더니… 혼자 중얼거리며 차를 대고 화장실로 향했는데, 세상에 줄이 공연장 입장 대기줄처럼 길게 휘어져 있었습니다. 줄에서 한참을 서성이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거의 6시 반이 다 되어 있었습니다. 드디어 7시, 출발 신호와 함께 어제 산 새 러닝화가 먼저 튀어나갑니다. 마치 광고 속 주인공처럼 가볍게 날아오르는 느낌으로 3분쯤은 진짜 나 오늘 기록 세우는 거 아냐? 하는 기분으로 신나게 달렸습니다만 문제는 내 다리가 그 신발의 열정을 전혀 따라가지 못했다는 것. 다리가 점점 무거워지더니 결국 허리 굽은 할머니들로 구성된 팀 쪽으로 스멀스멀 밀려났습니다. 그리고 충격적인 사실 하나, 이 할머니들조차 나보다 훨씬 더 잘 뛰고 있었다는 점. 이쯤 되니 노화가 아니라 그냥 실력 문제일지도 모른다는 진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1마일 표지판을 지나면서, 여기서부터는 빠른 걷기와 어설픈 뛰기의 콜라보로 가자고 스스로와 협상을 합니다. 조금 뛰다가,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면 바로 걷고, 다시 양심이 찔릴 때쯤 또 뛰고. 2마일 지점쯤, 크리스마스 시즌에만 열리는 산타 빌리지를 끼고 도는 코스가 나왔습니다. 눈도 안 오는 마이애미 한복판에 반짝이는 조명과 겨울 놀이공원이 펼쳐지니, 숨이 차서 힘든 와중에도 괜히 마음이 말랑말랑해집니다. 그래, 기록은 이미 글렀지만, 적어도 분위기라도 만끽하자라는 말도 안 되는 합리화를 하며 또 한 번 빠른걷기 모드로 진입했습니다. 트랙을 한 바퀴 돌아 결승선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5K-3마일, 50분 기록이 보입니다. 누가 들으면 산책한 줄 알 시간입니다. 남편의 10K 퓌니시 타임보다도 늦게 들어왔다는 사실은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다는 듯이, 러닝크루 팀원들은 웃으며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 와중에 현 언니와 김 언니는 각자 나이 그룹에서 3등을 해 예쁜 메달을 하나씩 더 받았습니다. 멋진 언니들과 대단한 마이애미 러닝 크루 팀원들! 레이스를 마치고 나니 갑자기 배가 고파졌고, 기념 사진 몇 장 더 찍고, 수다를 한 바가지 떠들고 나서 땡스기빙데이에 문을 여는 맥도날드로 향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는 푹 쉬다가 아들이 구워주는 스테이크를 먹고 아이들과 요즘 핫하다는 기묘한 이야기를 보며 소파에 늘어져 하루를 마무리했습니다.
금요일에는 오랜만에 아이들과 큐반 베이커리에 가서 카페 콘 레체 한 잔과 큐반 샌드위치, 바삭한 구아바 페이스트리를 아침으로 먹었습니다. 마이애미의 아침은 역시 큐반 빵과 진한 커피로 완성된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아침을 든든히 채운 뒤에는 데이드랜드 몰로 향해 블랙프라이데이 쇼핑에 도전합니다. 한때는 줄 서서 기다려야 할 만큼 ‘빅세일의 성지’였던 그곳이었지만, 이제는 예전만큼의 짜릿한 할인은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눈에 띄는 것은 세일 표지판보다 인플레이션의 위엄이었고, 가격표를 볼 때마다 괜히 한숨이 새어 나옵니다. 실망스러운 쇼핑을 마치고 딸이 준비한 패밀리 아트 워크를 시작했습니다-오늘의 프로젝트는 컵에 그림 그리고 오븐에 굽기 입니다. 각자 흰 머그컵 하나씩을 앞에 두고, 펜과 물감을 들고 앉으니 갑자기 집이 작은 공방처럼 변합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동안 서로에게 일어났던 일들, 힘들었던 순간, 즐거웠던 시간들에 대한 얘기가 컵 위에 천천히 그려집니다. 누구는 선 하나 긋는 데도 5분을 고민하는 꼼꼼한 스타일이었고, 누구는 물감 튀기듯 휘리릭 그려 놓고 “이게 바로 감성이지!”를 외치는 덤벙 스타일입니다. 평소엔 잘 보이지 않던 각자의 성격이 컵 위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오븐에 컵이 구워지는 동안, 부엌과 거실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수다와 웃음이 식탁 위를 가득 채웠습니다.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던 함께 보내는 시간이 뜨거운 머그컵과 함께 다시 우리 손에 돌아온 느낌이었습니다. 완성된 컵을 손에 쥐고 보니 비싼 명품 머그보다도 훨씬 마음에 들었습니다. 언젠가 이 컵에 커피를 따라 마시며, 그날 우리가 이런 얘기 했었지? 하고 되돌아 볼 날도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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